"Welcome to the Feng Ding Kingdom :-)"
울산 UNIST에 위치한 기초과학연구원(IBS) 다차원 탄소재료 연구단의 한 연구실. 탄소 구조물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던 펑딩 그룹리더(UNIST 교수)가 이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왕관 모양을 만들어냈다. 소년 같은 미소를 자랑하는 펑딩 교수는 탄소 이론 및 컴퓨터 시뮬레이션 분야 석학이다. 세계 곳곳에서 출간된 탄소를 소재로 한 연구논문엔 그의 이름을 심상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탄소와 함께한 지 20여 년. 그가 '과학자들의 유명인사'로 자리매김한 이유는 뭘까.
한국에 정착한 모태 기초과학자 "과학자라는 꿈을 꾸게 만든 특별한 계기조차 없었던 것 같아요. 아마 기초과학자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닐까요? 모태 과학자라고나 할까."
[피플 인터뷰 영상보기] 펑딩 IBS 다차원 탄소재료 연구단 그룹리더
어릴 때부터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며 떡잎부터 다른 자태를 뽐낸 사람을 '모태 미녀'라고 한다. 연예계에 모태 미녀가 있다면 IBS에는 모태 과학자가 있다. 펑딩 교수는 학창시절부터 줄곧 과학교과목 성적이 좋았다고 한다. 교과서 속 과학지식이 자연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을 설명한다는 점이 그의 흥미를 끌었다. 과학이론을 공부하고 연구하게 된 것은 그에겐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IBS 다차원 탄소재료 연구단에 합류하기 전, 펑딩 교수는 홍콩폴리텍대의 영년직 교수로 일했다. 명성 높은 학교, 좋은 학생들과 함께하는 연구는 꽤 완벽한 삶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한 가지 열망이 있었다. 기초과학 연구에만 온전히 몰입하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로드니 루오프 IBS 다차원 탄소재료 연구단장의 전화 한통에 그의 한국행은 부지불식간에 결정됐다. 두 사람은 학회에서 안면을 익힌 적은 있었으나, 개인적인 친분이나 교류는 없었다.
"기초과학의 부흥을 위해서는 정부나 기관 차원의 적극적인 지원과 적절한 압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IBS는 기초연구를 수행하기 위한 최적의 기관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20년째 탄소와 '밀당' 중
"대학시절 제가 사용해본 첫 개인용 컴퓨터(PC)는 하드디스크조차 없었지만, 사람의 두뇌보다 수백만 배 빠른 연산이 가능했습니다. 이 기계가 향후 인간을 넘어서는 능력을 갖게 되리란 생각을 하게 됐고, 컴퓨터 시뮬레이션 연구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어느덧 40대 중반이 된 모태과학자는 현재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한 탄소재료 이론 연구 분야의 대가가 됐다. '무어의 법칙'이 예견한 것처럼 컴퓨터는 18개월마다 집적도를 2배 씩 높여가며 성능이 향상됐다. 오늘날 최고 수준 사양을 자랑하는 슈퍼컴퓨터는 펑딩 교수가 대학 시절 사용했던 PC(IBM-PC)에 비해 수십억 배 이상 빠른 연산속도를 자랑한다.
▲ 펑딩 교수가 이끄는 다차원 탄소재료 연구단 이론그룹은 여러 가지 탄소 기반 물질의 이론적 특성을 연구하고 있다.
(UNIST 제공)
"컴퓨터의 사양이 높아지며, 시뮬레이션 연구를 통해 우리가 아는 모든 물질을 원자적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정말 놀라운 발전이죠."
탄소를 연구한지 어언 20년. 탄소와 펑딩 교수의 '밀당(밀고 당기는) 연구'는 현재 진행형이다. 박사후연구원 시절부터 그의 목표는 가상공간에 새로운 성질을 갖는 탄소 소재를 합성하고, 물성을 분석해 인간이 유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신물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해결해야 할 또 다른 문제가 드러났다.
"탄소 연구는 끊임없이 주어지는 문제를 순차적으로 해결해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꽤 긴 시간을 연구 해왔지만, 앞으로도 저는 평생 탄소와의 인연을 이어가리란 생각이 듭니다. 끝이 없는(never-ending) 연구죠."
상상을 뛰어넘는 신소재 개발 견인
주기율표상의 여섯 번째 원소인 탄소는 독특한 물성을 갖는다. 가볍지만 결합력은 강하고, 전기적으로도 우수하다. 이런 특성이 다이아몬드, 탄소섬유처럼 강력한 소재를 구성하는 원동력이 된다. 컴퓨터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직 해결해 나가야할 문제는 무궁무진하다.
인간은 흑연과 다이아몬드가 모두 탄소 원자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흑연을 고부가가치의 다이아몬드로 변신시키는 법을 알지는 못한다. 앞으로의 과제는 탄소의 우수한 성질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물질을 합성하는 일종의 '레시피'를 이론적으로 발견하고, 실제로 이를 합성해내는 것이다.
▲ 펑딩 교수와 국제공동연구진은 나노미터(nm) 크기의 다이아몬드가 탄성을 가진다는 새로운 특성을 규명했다.
(출처: Science)
펑딩 교수는 이미 독특한 특성을 지닌 물질을 만들 레시피를 찾아낸 성과도 올렸다. 대표적으로 '휘는 다이아몬드'가 있다. 가장 단단한 광물로 알려진 다이아몬드가 나노미터 크기로 작아지면 최대 9%까지 휘어진다는 점을 규명한 성과다. 국제 공동연구를 통해 실제 휘는 다이아몬드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 연구결과는 최고 권위의 국제학술지 '사이언스(Science)' 4월 20일자에 실렸다.
이처럼 펑딩 교수가 이끄는 다차원 탄소재료 연구단 이론그룹 연구진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 넘는 신물질의 합성법과 물성, 성장 메커니즘을 계속 규명해 나가고 있다. 30개 이상의 국제 연구팀과의 공동 연구를 통해 국제적 영향력도 높여나가고 있다. 이론연구가 실험을 뒷받침한다는 구시대적 발상을 탈피하고, 실험 연구에 '큰 그림'을 그려주는 주도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론 연구에선 실험에서는 보지 못하는 모든 것을 두루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 시뮬레이션 연구 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온 적이 있냐는 우문에 펑딩 교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화학분야 유명 저널에 등재되는 논문의 30% 가량이 이론 연구라는 것은 알고 있냐고. 그의 앞으로의 연구계획을 물었다.
"다이아몬드, 그래핀, 풀러렌, 탄소나노튜브 등 탄소 소재 물질의 특성에 대한 완벽한 이론을 만들어갈 계획입니다. 이론적 숙제가 해결되면 다차원 탄소재료 연구단을 포함한 전 세계 과학자들은 실제로 새로운 성질을 가진 탄소재료들을 합성해낼 겁니다. 이렇게 탄생한 신물질이 산업계에 유용하게 사용되는 것은 물론, 인간의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드는 데 활용되리라 기대합니다."